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04 세인트루이스 올림픽 (문단 편집) == 상세 == [[루이지애나 구입]] 100주년 박람회의 부속 행사로 올림픽을 활용하려는 중서부 실력자들의 압력으로 치러진 대회. [[시카고]]가 개최 예정이었지만 세인트루이스가 독자적인 체육 대회를 열겠다고 위협, 개최권을 가져온다. 개회식과 폐회식의 절차도 없이 진행되었다.이 대회가 얼마나 개판인지는 이 [[https://source.wustl.edu/wp-content/uploads/2004/06/950.jpg|사진]] 하나로 증명된다. 골목에서 펼친 이 허들 경기의 장면이 이 대회의 실상을 잘 알려준다.[* 뒤에 있는 잘린 흑인 선수는 흑인 최초의 메달리스트인 조지 포지이다.(200미터, 400미터 허들에서 동메달을 땄다.)] [[1900 파리 올림픽]] 때도 그랬지만 이 올림픽은 아예 올림픽과 [[만국박람회]]가 같이 열렸으며, 기간도 그에 맞춰서 상당히 길게 진행이 되었었다. 다만 기간이 길긴 했어도 당시 [[러일전쟁]] 때문에 분위기가 묘해졌던지라 거리가 먼 국가에서는 참가를 하지 못했으며, 대부분 미국 선수나 캐나다 선수들이 참가하였다. 여자선수가 참가하긴 했지만 고작 6명만 참가했을 정도. 대회 자체도 망했지만, 이 망한 대회를 어떻게든 끌어올려보려고 계획했던 [[인류학의 날]] 행사가 기획부터 문제였던지라 욕만 대차게 먹은 올림픽이기도 하다. 만국박람회와 러일전쟁등 국제정세로 두차례나 올림픽이 유명무실해지자 IOC는 아테네에서 유럽국가를 중심으로 한 [[1906 아테네 중간 올림픽|중간대회]]를 개최키로 합의, 그리스는 적국인 [[오스만 제국]]까지 참가시키면서 중간 대회에 열의를 보였으나 첫 대회 직후 크레타 전쟁에서 참패하고 발칸반도 일대의 긴장이 누그러들지 않는 상황이라 중간 대회 이후 그리스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. 전대회에서 제외되었던 역도와 레슬링이 추가되었으며, [[복싱]]과 한손 역도(덤벨), [[레슬링]] 자유형과 근대 10종경기가 정립되고 정식종목으로 추가되었다. [[농구]]와 [[야구]]가 시범종목으로 추가된것 이외에는 전대회와 크게 차이가 없는 종목을 보여준다. 참고로 1, 2, 3위에게 금, 은, 동메달을 수여하기 시작했던 대회가 이 대회부터였다. 기간이 늘어남에 따라 종목수도 상당히 세분화되었고 메달도 많이 걸렸지만, 유럽 쪽 선수들이 거의 참가를 못했기 때문에 '''대부분의 메달을 미국이 쓸어갔다.''' 미국 선수단도 가장 많은 526명이 참가하였으며, 세부종목까지 포함해서 메달을 전부 미국이 쓸어간 종목[* 양궁, 복싱, 사이클, 로크, 테니스, 줄다리기, 수구, 레슬링]도 있고, 메달이 많이 걸린 육상도 대부분의 메달을 싹쓸이 해갔을정도.[* 어느 정도냐면 당시 1위했던 미국이 '''금 78, 은 82, 동 79, 총합 239'''개이며, 그나마 그 차점인 쿠바가 '''금 5'''개, 3위인 독일이 '''금 4, 은 4, 동 5, 총합 13'''개로 거의 넘사벽 수준으로 따버렸다.] 이쯤 되면 올림픽이라는 이름이 부끄러운 거의 미국 국내 대회 수준이다. 1, 2회 대회 때 미국의 가능성을 봤던 쿠베르탱은 이 대회에 많은 기대를 걸었으나 만국박람회의 시시한 부속행사 수준으로 전락하자 매우 실망한 나머지 아예 대회에 참석하지 않았다. 미국에서 개최되었기 때문에 수영과 사이클에서는 미터가 아니라 마일로 측정하기도 하였다. 이 올림픽의 주 경기장이었던 프랜시스 필드는 현재 워싱턴 대학교 (Washington University in St. Louis) 소유로, 학교 스포츠 팀의 홈 구장으로 쓰이고 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